[잡담] 세계에서 가장 길게 생산중인 키보드
IBM Enhanced Keyboard "Model M" (1985-현재)
를 샀습니다.
IBM은 PC를 정립했습니다. 키보드도 마찬가지인데, PC AT 5170 이전의 괴이한 83/84키 배열을 버리고 내비게이션 클러스터를 추가해 총 101키, PC/AT 키보드 배열을 확립합니다. 그 흔적은 윈도우가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데, 윈도우 설치시나 드라이버를 확인해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IBM의 정식 명칭 그대로 한국어로 옮긴 PC/AT 향상된 PS2 키보드(101/102키) 가 이 친구의 드라이버이고 얘가 바로 표준 키보드입니다.
락 라이트도 현대 키보드 대부분이 IBM의 것 그대로를 따릅니다. 스크롤 락은 현재 엑셀에서나 쓰일까 말까 하지만 당시 PC환경에서는 나름 유용하게 쓰였고, 캡스락은 지금도 쓰이지만 넘버락은 당시 기준으로도 잉여였습니다. 어차피 넘버락을 비활성화 시키고 쓰는 기능들은 모두 내비게이션 클러스터에 들어가 있는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전 배열에서 유의미하게 쓰였던 기능이라 익숙함을 위해 추가했던 것이고, 현재까지 사실상 키보드 전원 라이트와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IBM Model M은 1985년 생산되기 시작했으며, 그게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30년 넘게 생산설비가 유지되고 있고, 현재도 구할 수 있습니다. 브랜딩만 IBM -> Lexmark -> Unicomp 로 변경되었고 중요한 특징들은 바뀌지 않고 꾸준하게 계속 생산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키보드 중에 하나임에도 지금껏 살아남았습니다. 기계식 시장의 체리처럼 끈질기게요.
제가 구한 모델은 1세대로 알루미늄에 검은색 패드프린팅 IBM 로고가 새겨진 버전입니다. 무게도 가장 무거워서 2.25KG입니다. 이후론 보강판을 조금 더 얇게 만들면서 점점 더 가벼워집니다. 대체로 무거울수록 튼튼하니 1세대가 가장 튼튼하지만,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키보드도 튼튼함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핫플러그용은 아니지만 관리의 편의성을 위해 케이블이 분리가 되는 형태입니다. 키보드에는 SDL 숫단자로 연결되고 PC에는 PS/2 및 DIN 커넥터 숫단자로 연결됩니다. M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형태라 180도 DIN 커넥터를 사용하며 패시브 어댑터로 간단히 PS/2로 연결 가능합니다. 현재 사용하는 메인보드에 PS/2 단자로 연결이 가능하지만 당연하게도 연결시 재부팅이 필요하기 때문에 매우 귀찮습니다. PS/2->USB 액티브 어댑터를 사용하면 USB 단자로도 이용할 수 있고, Soarer's converter라 불리는 Atmel 사의 AVR칩을 이용해 프로토콜을 코딩하면 리매핑, 매크로, 플러그 앤 플레이 기능 등을 모두 사용 가능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델 M의 키캡은 두꺼운(1.2-2T+) PBT 염료 승화 키캡이며 지금 생산하는 키캡도 문제 없이 호환됩니다. 염료 승화도 30년 세월이 지나서 주변으로 약간 번지거나 옅어지긴 하지만 (om 윗부분이 아주 미세하게 옅어졌습니다.) 레터링이 지워진 경우는 저도 본 적이 없습니다. PBT 이색사출이 현대에 제조된 키캡에서나 찾아볼 수 있으니만큼 사실상 키캡의 수명도 가장 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델 M 대다수는 수축 통제가 어려워 만들기 힘든 스페이스바 조차도 PBT이고 케이스 전체가 PVC라 변색이 없어 세월이 지나도 늘 새것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
(현재도 유니컴프에서 생산중인 모델 M용 멤브레인 시트, $10)
IBM 모델 M은 멤브레인 버클링 스프링 키보드입니다. 실제로 내부에 PCB 기판이 없는 대신 회로가 인쇄된 얇은 플라스틱 박막이(Membrane) 있고, 스프링이 일정 압력을 넘기면 꺾이는 좌굴(Buckling) 현상을 이용해 멤브레인의 접점을 서로 붙입니다. 이 때 키 입력이 일어나고, 손을 떼면 반발력으로 스프링이 펴지면서 키 입력을 떼고 키를 원래 위치로 복원합니다.
오롯이 스프링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에 기계적 구조가 단순하고 신뢰성이 높지만 거의 완전히 개방된 스위치 구조 특성상 매우 시끄럽고 독특한 스프링의 잔향을 남깁니다. 따라서 버클링 스프링은 소리 그 자체만으로도 호불호가 매우 갈리는 편입니다.
흔히 체리 MX 청축이 버클링 스프링을 따라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건 입력과 해제 위치가 다른 이력 현상(Hysteresis)을 포함한 스위치의 특성이 유사하다는 것이지 키의 소리 뿐만 아니라 입력 촉감 면에서도 차이가 큰 편입니다. 버클링 스프링은 체리 같이 뭔가 걸리는 돌기가 있는 게 아니라 리니어 느낌으로 들어가다가 무너지는 강력하고 확실한 구분(Tactility)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종 압력은 체리 MX 흑축과 비슷한 정도로 약간 무거운 편입니다.
멤브레인 방식은 러버돔의 동의어가 아닙니다. 러버돔이면서 멤브레인을 사용하지 않는 키보드도 있으니 참인 명제가 아니죠. 단지 가장 저렴하게 키보드를 만드는 방법이 러버돔과 멤브레인 조합입니다. 그래서 현대 키보드는 대부분 멤브레인 러버돔이죠. IBM 모델 M도 멤브레인이니만큼 다이오드나 커패시터로 키보드 내의 매트릭스 구분이 불가능하므로 2키 롤오버(안티 고스팅 포함)가 최대입니다.
2KRO는 키보드 매트릭스 내의 행/열이 겹치는 부분, 즉 QW를 누르고 있으면 AS를 눌렀을 때 동일한 회로가 구성되기 때문에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좌표상으로 (1,1) (1,2)가 활성화되면 (2,1)이 활성화 된 경우 (2,2)도 눌러져 버리는 것과 동일한 효과가 나고 (고스팅) 이를 막기 위해 애초부터 그 키들의 입력을 막는 것 (안티 고스팅)이 최선이기 때문에 2KRO를 동시입력의 최소값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키보드 매트릭스 상의 행 열이 다르다면 추가적인 동시 입력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게이밍에서 쓰일 법한 저런 조합(우상단 달리기+수류탄+스크린샷) 도 큰 문제 없이 동시입력이 가능합니다. 대개 4-8키 동시입력이 가능하며 일반적인 타이핑이나 게이밍에서는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생산되는 유니컴프 사의 모델들은 매트릭스가 약간 다르게 되어 있어 윈도우키를 포함한 모디파이어 키들은 더 많은 롤 오버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축전식이나 기계식의 NKRO 가능 모델에 비하면 제약받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들에 비하면 불리한 것이 사실입니다.
IBM 모델 M의 원래 가격은 요즘으로 치면 60만원이 되지만, 현재는 그 반의 반 이하로 구할 수 있습니다. PC가 이젠 IBM에서 제조하는 물건만을 가리키지 않듯이 키보드도 IBM 모델 M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요. 특히나 유니콤프제 신품 키보드는 $100 언저리에서 구할 수 있어 현대의 기계식 키보드 제조사의 그것과 가격이 유사합니다. 물론 탱크같은 빌드 퀄리티는 원가절감상 너프되었지만 그래도 지금 만들어지는 키보드 중에서 가장 튼튼한 편에 속하고 키감 또한 유지되어왔기 때문에 무지막지한 키보드 크기만 버틸 수 있다면 괜찮은 선택입니다. 마티아스와 더불어 범 체리계 키보드와는 다른 독특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유이한 선택지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시장의 지속성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카일이 근래에 체리의 디자인이 아닌 고유의 키 스위치 디자인을 낸 것 처럼 고가 키보드 시장에서도 새로운 시도는 늘 필요한 거 같습니다. 오래된 것을 지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지만 시장의 다양성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체리처럼 모델 M은 단 한번도 쉼 없이 만들어져 왔고, 처음부터 생산된 모델에서 지금까지 생산되고 있는 모든 키보드에 제조 일자가 박혀있는 자부심 넘치는 키보드입니다. 한 세대, 30년을 오롯이 버텨왔는데 앞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도대체 얘는 고장나기나 하는건지 꼭 지켜봐야겠습니다.
잼아저씨's Sig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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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구형 키보드에 자주 보이던 저 조명(넘락 스크롤락 캡스락 모여있는1..) 디자인과 배열은 이놈이 원조였군요...
네, 말 그대로 표준 키보드입니다. 근데 넘나 크고 아름다워서 마우스를 쓰는 지금쓰긴 조금 불편합니다.